Namsan bongsudae Lighting Ceremony

남산 봉수대 봉화의식

인터넷을 뛰어 넘는 통신수단 남산하늘, 또 하나의 풍경 !
The sky og Namsan(Mountain) that provides another meaningful scene of seoul!
HOME > 남산 봉수대 봉화의식 > 남산 봉수대 행사절차 복식 및 기물 체험행사 행사장 위치

01 남산봉수대 봉화의식

남산봉수대는 전국의 봉화대에서 올라오는 봉화를 최종적으로
집결해 상황을 도성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남산은 서울특별시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서 해발 262m 높이의 산으로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과 함께 서울성곽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남산은 목멱산, 종남산, 인경산, 열경산, 마뫼
등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남산 봉수대는 길명 경봉수 또는 목멱산 봉수라 하여 세종 5년(1423년) 2월 병조의
요청에 따라 남산에 설치된 5소의 봉화중 하나로, 전국의 봉화대에서 올라오는 봉화를 최종적으로 집결하여
도성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경국대전》에 전하는 수도 서울의 봉수대는 목멱산에 있는 목멱산 봉수대인데,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수대 라고도 하였다.
서울 외곽에 있는 동족에 용마산, 서쪽에 덕양산, 남쪽에 관악산, 북쪽에 북한산이 있다. 이 네개의 산을 옛적부터 외사산이라 하였고,
내사산이라고 한 네개의 산은 동족의 낙타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목멱산, 북쪽의 백악산을 말한다.
남산(목멱산)은 서울의 내사산의 하나로 지금 서울 중심가의 남쪽에 솟아있는 해발 265m의 명산이다. 서울 분지의 남쪽을 막으며
좌우의 능선을 끼고 도는 성곽의 남쪽 중심지였고, 옛 사람들은 이 산을 형용해 달리는 말이 안장을 내려 놓은 것 같은 모양이라고 하였다.

남산봉수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여 제1, 제2, 제3, 제4, 제5봉의 5개소가 있었습니다. 동쪽 제 1봉은 조선 태조 5년 4월 29일에 한성부를 5부 52방으로 구획한 그 52방 중, 남부 명철방 쪽 산마루에 있었는데, 양주의 아치산 봉수와 연결하여 함경, 강원도 방면을 통하였고, 여기에 연결되는 직봉이 120곳, 간봉이 60곳이었습니다. 제 2봉은 성명방 쪽 산마루에 있었는데, 광주 천천령 봉수와 연결하여 경상도, 충청도 방면을 통하는 것으로 여기에 연결되는 직봉이 40곳, 간봉이 123곳 입니다. 제 3봉은 훈도방 쪽 산마루에 있었는데, 무악의 동봉과 연결하여 평안도, 황해도 방면의 육로를 통하는 것 으로 직봉이 78곳, 간봉이 22곳입니다. 제 4봉은 명례방 쪽 산마루에 있었는데, 무악의 서봉과 연결하여 평안도, 황해도 방면의 해로를 통하는 것으로 직봉이 71곳, 간봉이 35곳이며, 제 5봉은 호현방 쪽 산마루에 있었는데 양천 개화산 봉수와 연결하여 전라도, 충청도 방면의 해로를 통하는 것으로 직봉이 60곳, 간봉이 35곳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남산의 봉수대는 한양천도 초부터 갑오개혁 전까지 500여년간이나 존속되었으나, 남산은 임진왜란 때 남산의 북록 일대가 모두 왜군의 유진지가 되었습니다. 왜군은 서울 입성과 함께 북촌의 왕궁과 관아, 거가들을 모두 분탕 및 약탈하였고, 이 남산 산록지역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봉수가 그들에 의해 파손됨으로써 임란 후의 봉수의 기능 마비를 초래케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남산 봉수대는 병조의 무비사가 관장하였으며, 봉수군과 오원(지방에서는 오장이라고만 칭함)이라 칭하는 감고를 배치하였는데, 이 감고는 봉수군의 근무상태를 현장에서 직접 감독하고 감찰하였다. 이 남산의 경봉수에는 세종 28년 10월에 종전까지는 15명이었던 봉수군을 20명으로 늘려 상하 양번으로 나누어 매소에 두명씩 입직케 하였으며, 《경국대전》에서는 매소에 봉군 네명, 오원 두명을 배치하였던 것이다. 경봉수의 봉수대 요원은 봉수군과 감고인 오원 외에 금군(처음에는 충순위군) 중에서 고액 녹봉자를 봉수군장에 임명하고, 윤회 수직케 하여 변방으로부터 올라온 정보를 병조에 보고케 하였다. 병조는 변방의 보고를 매일 새벽 승정원에 보고하여 국왕에게 알리고, 변란이 있으면 밤중이라도 즉시 승정원에 보고하였다. 서울지역의 봉수대 가운데 남산과 무악 두 곳의 봉수대에 있어서 봉수군의 호보(호수는 30호로 하고 매소에 각 세명씩의 보인을 급여함)는 모두 각각 120명으로 하되, 스물네번으로 나누고 매번에 다섯명씩을 입번케 하고 6일마다 교체하였다.

봉수제도는 국가의 중요한 통신수단으로서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이나 또는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동시에 해당지방의 주민에게 알려서 위급에 신속하게 대처하이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목멱산 봉수대에는 봉수군으로 군사 네명과 오장 두명을 배속시키는데, 모두 봉수대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들로서 선정 임용하였으며, 근실하고 품위 있는 관원 네명을 따로이 선정하고 두번으로 나누어 봉수군의 임무를 간고하되 주야로 서로 교대하여 점검케 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점검을 안한 경우에는 혼장의 중형으로 다스렸습니다.

02 거화 및 전보

국경의 중요한 군사정보는 그 정서의 완급에 따라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거화법에 의하여 전보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의종 4년(1150년)에 규정된 봉수식에 따라 네개로 구분되었습니다. 고려말에서 조선 초에는 2구분법으로 변경되었다가 세종 1년(1419년)에 획기적 봉수제의 확립과 함께 5구분법으로 재구분 되었습니다. 이 때는 해상과 육상을 구별하여, 해상의 경우에는 평상시엔 1거, 왜적이 해중에 나타나면 2거, 해안에 가까이 오면 3거, 접전시에는 4거, 육지로 침입하면 5거로 하였으며 육지의 경우에는 적이 국경 밖에 나타나면 2거,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거,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접전시에는 5거씩 돌리도록 했습니다.
거화법에 의하여 상달된 정세는 경봉수에서는 오원이 병조에, 지방봉수에서는 오장이 관할진장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제일선 군사요새로서의 연대에서 적의 침입을 주위에 급히 알리는 수단으로 봉화 이외에 포성과 각성이 병용되었습니다.

03 봉화를 올리는 신호형태 및 거화재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을 이용해 소식을 전달하고, 비가 오거나 구름이 덮혀 봉수로 연락이 불가능 할 경우에는 작은 북, 뿔나팔, 불화살, 태형깃발 등으로 급보를 알렸으며, 이것도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뛰어가서 소식을 전달했습니다.거화의 재료로는 이리와 말, 소, 토끼똥, 쑥, 풀, 싸리, 관솔, 땔나무 등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재료가 연료로 사용되며, 탄, 화, 조당 등은 주재료에 섞어 낮에 거화시 연기가 바람에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한 보조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