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알린다는 자부심으로 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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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2-12 17:42 조회2,32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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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덕수궁 앞을 지키는 수문장, 그들은…
서울시가 교대의식 위탁한 행사전문업체 직원들
30도 넘나드는 한여름에도 옷 3~4겹씩 입고 비지땀
힘들고 체력 소모 크지만 국내외 관광객 칭찬에 큰 보람
지난 4일 오전 11시,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은 짐짓 근엄한 표정을 한 일군의 장정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옛 군복 차림에 커다란 모형 창까지 든 이들은 조선시대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을 재현 중인 수문군(守門軍)들. 팔짱을 끼고 대한문 앞을 지나가던 한 쌍의 남녀는 그들을 흘깃 보며 수군거린다. "쟤들, 알바(아르바이트)야?" "아니, 공익근무요원일 걸." 남들이 뭐라고 하든, 수문장들은 미동도 없이 앞만 노려본다.
덕수궁 앞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처음 시작된 건 1996년이다. 벌써 13년간 월요일만 빼고 매일같이 하루 세 차례씩(오전 11시, 오후 2시·3시30분) 계속해 왔으니 어지간한 서울시민이면 한 번쯤 봤을 법하다. 세월과 함께 입소문도 퍼져 작년에만 72만4000명이 관람했다. 서울을 소개하는 여행 가이드북과 팸플릿에도 빠지지 않는 필수코스가 됐다.
그러나 전통 옷을 차려입고 자리를 지키는 수문장, 때로 수염까지 붙인 채 뙤약볕에서 비지땀을 흘리는 주역들의 정체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생이다, 공익근무요원이다, 전·의경이다, 설이 분분한데…, 알고 보면 이들은 서울시가 수문장 교대의식을 위탁한 행사전문업체의 어엿한 직원들이다.
▲ 덕수궁 앞‘수문장 교대의식’의 주역들이 6일 오후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안 대기실에서 복장을 갖춰 입고 있다./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한여름 옷 껴입는 게 고역
수문장들은 평소 어디에 있을까? 정답은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부속건물의 80㎡ 남짓한 대기실'이다. 수문군, 문·무·내관, 취타대(吹打隊)를 맡은 연기자들과 진행요원, 영어·일어·중국어 통역, 분장사까지 80여명의 수문장 교대의식팀이 같이 쓰는 방이다. 대기실 안은 보통 행사가 시작되기 40여분 전부터 어수선해진다. 수문군을 맡은 20대 청년들부터 문·무·내관역을 맡은 40대 중년들까지 각기 복장을 갖추고 교대의식에 나가자면 늘 번잡함을 피할 수 없다.
4일 오전 10시30분, 대기실 안에선 수문군 41명이 부산을 떨며 옷을 입고 수염을 붙이고 있었다. 수문군 대부분이 키 180㎝는 되는 장정들이라, 좁은 방 안에서 부대끼며 3~4겹씩 옷을 껴입는 모습은 옆에서 보기에도 힘들어 보였다. "기온이 30도를 넘나드는 날에도 속옷, 겉옷, 저고리 등 긴 옷을 최소한 3겹씩 겹쳐 입고 얼굴에 수염까지 붙여야 해요." 수문군 중 한 사람인 이승권(22)씨는 "신발도 가죽 재질이라 통풍이 안 되니 한여름엔 정말 체력이 달린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더우나 추우나 매일 대한문 앞에 나서야 하는 수문군들이 여름철 그나마 기댈 곳은 나일론 재질의 얼음조끼다. 밤새 꽁꽁 얼린 얼음팩을 4개씩 조끼 주머니에 넣어 걸치고, 그 위에 겉옷을 입어야 땡볕 아래에서 쓰러지지 않고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여름이면 하루 수문군들이 쓰는 얼음팩만도 수십 개나 된다. 그래도 기온이 35도를 넘거나 눈·비가 오면 복장과 장비가 망가질까봐 의식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
날씨 탓이 아니라도 고충은 많다. 일단 대한문 앞에 자리를 잡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30분쯤씩 미동도 않고 서 있어야 한다. 서로 교대하는 의식을 치를 때도 비틀거리지 않고 똑바로 걸어야 하고, 수문군 선봉에 서면 높이 3m는 족히 되는 홍문대기(紅門大旗)를 들고 있어야 한다. 서찬석 서울시 문화재과 주임은 "특별히 체격 제한을 두지 않아도 고된 일을 감당해야 하니 키 크고 건장한 장정들만 남게 된다"고 말했다.
◆수문군 복식 체험 외국인들에 인기
일이 힘들어도 수문장 교대의식팀을 뭉치게 하는 건 역시 '국가대표'의 자부심이다. 서울관광에 나선 외국인들이 엄정한 분위기 속에 이뤄지는 수문장 교대의식을 보고 '판타스틱!'하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연방 플래시를 터트리면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진다는 것이다. 교대의식 중 북을 치는 '엄고수' 역할을 맡은 이흥수(45)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으로 지난 6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관람 왔을 때를 꼽았다. "백발이 성성한 미국인 참전용사분이 우리 의식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젊은 시절 목숨 걸고 싸워서 지킨 한국의 전통과 문화가 보존되는 모습을 보니 너무 감격스럽다는 거예요."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에게 수문장 교대의식의 인기는 상상 이상이다. 대한문 앞에는 '복식체험 부스'가 있어 수문군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참가자 90%쯤이 외국인인 날도 있다. 4일 오전 11시 교대식 때 북 치는 의식에 자원한 헝가리인 스트리크(55)씨는 "교환교수라서 한국에 올 기회가 잦은데, 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덕수궁을 찾아 수문장 교대의식을 구경한다"고 말했다. "오늘 처음 직접 북을 쳐봤는데 '쿵'하는 떨림이 너무 인상적이라 좀처럼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스트리크씨의 딸 도라(17)양도 "한국 와서 구경한 모든 것 중 수문장 교대의식이 최고"라고 말했다.
강병우 시 문화재과 주임은 "어떤 관광객들은 영국 420년 전통의 버킹검궁 근위병에 비교할 만큼 수문장 교대의식을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서울을 알린다는 보람도 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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